약 500년전에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중 이곳에 들렀다가 산세를 훑어보니 클 '거(巨)'자와 같은 형국이며 거부장자(巨富長者)가 불어날 것이라고 하였기에 거진리(巨津里)라 부르게 되었다.
고기(古記)에는 거탄진리(巨呑津里)라 하였으며, 1915년 행정구역폐합으로 수외리(水外里)가 거진리(巨津里)에 편입되었는데 구.수외리(현 거진10,11리) 앞에 있는 자산천이 바다와 멀지 않은 곳에서 양분(兩分)되어 이부락 앞에서부터 해안 안쪽에 있는 원래의 국도옆을 따라서 거진1리 선착장까지 약1,000m를 길게 돌아서(우회) 흘렀기에 수회리(水廻里)라고도 불렀다.
옛부터 자산천이 두갈래 였던 것을 곧바로 바다로 흐르게 고친 후로는 넓은 하천부지와 해안매립 부지를 택지로 조성하여 마을이 생겼다.
거진리는 1922년부터는 오대면 소재지, 1940년부터는 거진면 소재지로 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부터는 거진읍 소재지로 되었다.
1940년대까지는 원산, 부산간 여객선의 기항지였으며, 1925년부터 1945년까지는 동해북부선(철로)의 거진역이 있었으므로 농산물과 해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하다. 최근 관광수요의 증가추세에 따라 화진포관광 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
1954년 9월 1일 수복과 동시에 거진리가 거진1,2리로 구분 되었다. 1959년 3월19일 인구증가로 거진3리로, 1960년 12월에 또다시 거진5리로 점차 확장 구분 하였으며, 1971년 1월 1일 빠른 속도의 인구증가로 6,7,8리로 확장 구분되었고, 1973년 9월 거진 9리에서 거진10리로 구분, 1981년 7월 1일 거진10리에서 거진 11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1980년 소도읍가꾸기로 해안도로가 개설되면서 새로운 도시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시장중심의 상권이 신설도로변으로 전이(轉移)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최근 주소득원인 어업이 계속 불황을 거듭하면서 인구의 도시유출이 심해져 인구가 감소하고있다.
이 마을 뒤에 있는 와우산(臥牛山)은 옛적에 자산(慈山)이라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자산리(慈山里)라 명명하고 마을앞 하천도 古記에는 거탄천(巨呑川)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자산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5년부터 1922년까지는 오대면 소재지였으며, 일제시대 때에는 봉평리 2구(區)라고 불렀다. 속칭명은 자솔리이다.
옛날 이마을에는 쑥이 많았으며 서방의 딴봉 밑에 연못이 있다하여 봉호리(蓬湖里)라 불렀는데, 이는 마을 앞 논과 공동묘지 앞 논밭에 농사를 짓기 위해 겨울이면 천수(天水)를 많이 가구어 놓아 이것이 봄철까지 만수(滿水)가 되어 마치 호수를 이루었으므로 용수구미(龍沼峴)로 구전되어 오다 봉호(蓬湖)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대에 오현면(梧峴面)이었을때 산세를 좌우한 봉평리와 화포리를 합쳐서 오현리(梧峴里)라 불러 오다 그후 지형상 연유로 두 마을의 앞과 뒤의 고개(峴)를 사이에 두고 각각 분리 했으며, 1915년 서편에 있는 밧두루마을(外坪里)과 합해서 봉평리(蓬坪里)라 명명 했다.
아득한 옛날 화포리는 예국의 땅으로서 그시대 당시 화포리 동쪽의 높은 산이 마치 매가 앉아있는 형상과 같다하여 응봉이라 하였다고 하며 응봉앞에 있는 현 화포리 마을의 도국형상이 작은 새가 응봉을 향해 날으는 형상과 같아 화포리의 옛이름을 응추촌(鷹雛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다섯 고을이 있었는데, 하나는 용이 앉았다 하여 밭용골, 소가 등에 얹은 삼정을 벗어 놓았다 하여 삼정골, 모시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모시골, 곰이 꿇어 앉은 것 같다 하여 능골, 산이 꽃처럼 생겼다 하여 화상골이라 하였다.
이 다섯골이 합하여 오현(梧峴)이라 불리어 왔는데 한 선비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이 나비형국이 되어 있으니 참 잘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그 말을 듣고 지성있는 한노인이 나비가 있으면 꽃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이 좋다고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선비가 화진포에는 갈꽃도 많이 피었더라 하여 그말을 듣고 농부들이 그 후 이 마을의 이름을 화포(花浦)라 불러 지금까지 불리어 오고 있다.
화포리 성씨로는 고려시대 이전의 성씨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는 노씨가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가다가 종적을 감추었고 그후 지금으로부터 약700년전 고려말엽 당시 울진 林씨가 정착 하였고, 그 다음은 파평 尹씨, 강릉 崔씨, 평창 李씨, 동래 鄭씨, 봉화 鄭씨, 김해 金씨, 경주 金씨, 정선 全씨, 안동 張씨, 연일 鄭씨 등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화포리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은 응봉산, 서쪽은 만포산, 중앙은 법고산, 각담산을 이루고 있다. 골은 장평동, 고진동, 반용동, 삼정동, 월평동, 차동, 묘시동, 응동, 만포동, 방화고동, 화산동 등으로 이루고 있다. 1915년 호반(湖畔)에 있는 장평리(長坪里)를 화포리에 편입 시켰다.
마을의 속칭명은 월안리(月安里)라 하는데 이는 뒷산이 반달형이라 하여 부르던 동반월동(東半月洞)과 서반월동(西半月洞)을 합쳐서 월안리라 하였다고 하며 후에 원래 서북간에 연못이 있다하여 부르던 원당리(源塘里)에 편입 됐다.
마을의 중심 일대에 노송이 많아 좋은 정자를 이루고 마을 앞 하천에는 맑은 물이 흐르며 앞산에는 냉정(冷井)터(일명 냉장골)가 있어 송정리(松亭里)라 부르게 되었으며, 1915년까지는 오현면(梧峴面) 소재지였다.
이 마을 서쪽에 옛부터 있었던 동대리(東垈里 속칭 동터) 바람부리는 일제시대 중엽에 이산(離散)되어서 현재는 농지가 되었다.
마을 뒤에 용의 형상을 닮은 암산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늪(湖)이 있었으므로 옛적부터 용호촌(龍湖村)이라 불러왔는데 1915년 행정구역 방향으로 하산북리(下山北里)와 합하여 용하리(龍下里)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시대 말에는 이곳에 토기를 만드는 토기점(土器店)이 1973년까지 있었다.
병인양요 후에 노인산 밑에서 토기를 구워 생계를 이어오던 마을인 토기점 마을과 거진면에서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부르던 상산북리란 마을이 흩어져 살다가 후에 두마을을 합쳐서 산북리라 불렀다. 속칭 산두라 부르다가 후에 산북리로 고쳐 부르고 있다.
학봉산하에 있는 대대골(大谷村)과 고대에 동구(東口)섬이라 부르던 몽강촌(夢江村)을 합하여 상걸리(上巨呑里)라 불러오다 후에 송강리(松江里)라 부르고있다. 수복당시 이 부락이 뒤늦게 입주가 허용되어 옛송강초등학교는 송정리로 옮겨졌다. 마을 남쪽에 해당하는 산에는 송림이 우거져 있었으나 1986년에 대형산불로 인해 많은 수목이 소실되어 현재는 잡목이 우거져 있다.
서북간의 문안골(門內谷) 어구에 있는 계류(溪流)의 양쪽산 옆에 절벽을 이루는 암석이 있는데, 그 모양이 돌기둥(石柱門)을 세운 것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석문리(石門里)라 불렀다. 문안골에는 옛 절터가 있다.
높은 산(高峴山) 아래인 와우산(臥牛山) 기슭에 여섯 모퉁이(동안터, 장밭골(長位田洞), 윗마을(上村), 새잇마을, 아랫마을, 을용동)로 나뉘어져 살며 마을길이가 1.5㎞나 되는 부락으로서 마을 앞에 길게 흐르는 소하천은 옛부터 장마때마다 범람하여 매년 농지가 사토(沙土)로 매몰 되어서 매우 모래(沙)가 많고 또는 외나무 다리가 많기로 유명하며 항시 다리놓기에 도끼(斤)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옛적에는 사근다리(沙斤橋里)라고 했다. 그후 조선 중엽에는 모래가 시내(溪)로만 흐르라고 사계리(沙溪里)로 고쳤다.(1915년까지 대대면(大垈面) 소재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는 대현문원공(大賢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아호가 사계(沙溪)이므로 유림(儒林)으로부터 리명 변경의 요구가 많아 1915년에 초계리(草溪里)로 개칭하였다.
이부락에 초계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자유당 초기에 오지(奧地)라고 하여 대대리로 옮겨졌으며 농경지 정리 후에도 다리가 7개소나 가설되어 한 마을에 다리가 많기로 유명하다.
태고때부터 마을 옆에 있는 바위 틈에서 옥수(玉水)가 잘 솟아 나오므로 옥길동(玉吉洞)이라 불렀다. 그후 조선 중엽에 와서 마을의 샘물을 주(周)나라의 유명한 칠수(漆水)에 비유하여 칠동(漆洞)이라고 고쳐 불렀다가 오동(梧桐)나무가 번성하여 자연적으로 정자(亭子)를 이루었다 하여 오정리(梧亭里)라 고쳐 부르게 됐다. 1915년부터 1945년까지는 초계리(草溪里) 2구(區)라고 불렀다.
마을의 뒷산인 노구산(老구山)이 마치 세마리의 큰 학(鶴)이 사이좋게 날개를 펴고 앉은 것과 같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터(垈)라고 하여 '학터' 또는 학대리(鶴垈里)로 옛날부터 불리웠다. 그후 어음(語音)이 자주 변하여서 현재는 '한터' 또는 대대리(大垈里)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전하여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마을 뒷쪽에 있는 노구산의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거북이가 사자 4마리를 등에 업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으며, 사자 4마리는 동서남북을 향하여 본마을을 사수하는 형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조선 중엽때 교동리(校洞里)의 마을 주민이 몰래 숨어 들어와 교동마을을 향한 사자의 아래턱을 부수어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 할미봉은 하늘에서 쫓겨 내려온 선녀가 이봉우리에서 살다 늙어간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선녀가 사용하던 장독모양의 바위가 아직 남아 있어 그 바위를 독바위라 부른다. 그래서인지 본 마을은 아직까지 할머니가 할아버지 보다 오래 살며 할아버지가 오래 사는 법이 없는데 할미봉이 높아 그렇다고 전해지고 있다. 1930년까지도 방축(防築)골에는 산기슭에 큰 늪이 있었는데 지금은 논으로 변했다.
방축동(防築洞)에는 조선 명종 원년(서기 1546년) 이전에 있었던 간성향교와 유적지가 있다.(향교는 1546년 간성읍 교동리로 이전) 최근 마을 야산주변에 청동기 유물들의 일부 발견되고 있어 청동기 주거지군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옛날에 송학동(松鶴洞)과 죽포리(竹泡里)라고 불리우는 두 마을이 있었다. 송학동(松鶴洞)은 송림이 무성하고 앞뜰에 학(鶴)이 찾아온다고 하여 칭하였고 또 한곳은 북천하구에 자리잡은 곳으로 앞산인 마산(馬山) 기슭에 호수와 대나무가 있어서 죽포동(竹泡洞)이라 불리웠다고 하는데 죽포동이 옛적에 수해로 인하여 가옥이 유실된 후 1915년에 두마을을 합하여 송죽리(松竹里)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 앞에 있는 마산은 옛날에 용마가 났으나 용마(龍馬)를 탈 장사가 마을에 태어나지 않아 용마가 의리상 그곳에서 죽었다고 하여 마산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해안이 돌아가는 모퉁이에 위치하였기에 옛적에는 돌구미 또는 회진리(回津里)로 부르기도 하였으며 마을 지하에 암반이 있다 하여 반바우라고도 불러오다 그후 마을 주변에 암석과 해중(海中)의 평평한 반석이 널려있기에 반암리(盤岩里)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서쪽에는 임진왜란 등 또는 국난이 있을때 마다 신호의 역할을 하였던 높은 봉수봉(옛 正陽山)이 있다.
송포는 두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아랫마을은 뒷산이 말이 누운 것 같은 형국을 하고 있으며 소나무가 잘 자란다고 하여 송마직리(松馬直里)라고 불리우다 후에 송림앞에 늪이 있다하여 송호리(松湖里)로 개칭했다. 윗마을은 북방에 있는 와우산(臥牛山)의 윗쪽으로 1㎞ 상거한 자산천 옆에 2,000평의 큰 늪 (浦)이 영조 22년(1789)까지 있었다고 하여 포남리(浦南里)라고 불리웠으며, 1915년 송호리와 포남리를 합해 송포리(松浦里)라 부르고 있다. 송호리는 송포2리로, 포남리는 송포1리로 각각 행정구역을 분리하였다.
약동쪽에는 석문리, 남쪽에는 간성읍 탑현리, 서쪽에 수동면 고진동계곡, 북쪽에 송강리와 용하리가 있다.대사찰인 건봉사가 있는 부락으로 관모봉(冠帽峰)과 건봉령(乾鳳嶺)에서 신비로이 흐르는 맑고 찬 샘물이 사찰과 마을 중심을 흐르므로 냉천리(冷川里)라 불렀다. 1989년도 민통선이 북상함에 따라 건봉사에 승려들의 거주가 시작됐고, 현재는 활발한 건봉사 복원사업으로 점차 옛날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냉천골은 송강리저 수지 축조로 인해 지금은 많은 부분이 물속에 잠겼다.
1950년 6.25를 전후하여 자연적으로 민가가 유리(流離)하여 지금은 부락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