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대범미진 (大범味津)이라 불렀고, 그후 安씨와 金씨가 개척하였다고 해서 안금리(安今里)라고 칭하다가 고려시대에는 여산현(驪山縣), 그후에는 열산현(烈山縣)에 속해 황금리(皇琴里 황구리)라고 불러왔고,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한나루(大津里)라 개칭 하였다.
그후 동해안을 따라 확장되는 신작로가 개설되고, 1920년에는 고성군 현내면 소재리로 승격 하였으며, 한나루(포구)에 축항을 쌓아 명실공히 조그마한 어항으로 축조되었고, 1925년부터 동해 북부선 철도공사가 시작되어 1935년에 개통을 보게 됨으로서 어항을 모체로 풍부한 수산자원(청어, 정어리)과 농산물을 원산으로 수송케 됨으로써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1945년 8.15해방 이후 1952년까지 북한 공산치하에 있었고, 그동안 6.25로 인해 철도는 파괴되고 이 마을의 200여호의 가옥이 잿더미로 폐허가 되었다. 1954년 10월 21일 대한민국 행정권이 수복되어 경향 각지에서 이곳에 피난민과 전재민이 일시에 많이 몰려 대진리 일원만 9,000여명으로 늘어 대진 1,2,3리 분할 관할하였고, 1973년에는 행정구역 조정상 2개리를 늘려 대진4, 5리로 분할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 지역에 샘이 많아 일명 샘동래 또는 9개소에서 샘이 솟는다 하여 구룡물이라는 속칭이 생겼다. 이 마을 앞바다의 섬에는 억새 따위의 새(草)와 수목이 많았으므로 초도(草島)라고 부르는 섬이 있었기에 '새임'이라고 칭하다가 진포(津浦)마을이므로 다시 초진리(草津里)라고 불렀는데 1915년 행정구역 폐합 때에 초도리(草島里)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18년~1919년까지는 현내면 소재지였다.
조그마한 마을에 뜻이 굳은 사람만이 모여 살았다 하여 옛부터 철통리라 속칭을 명명하여 지금의 명칭이 되었다.
이 마을은 동북쪽으로 열산현(烈山縣)때의 고성산(古城山), 서북쪽으로 노인산(老人山) 정상을 경계로 마을 중산평야지대로 중평천이 화진포로 흘러 내려 마을 앞에는 문전옥답의 1,000석 두루가 있어 옛부터 재해가 없는 부촌으로 이름나 있다.
마을 남쪽에는 초록빛 수려한 화진포가 있고 마을에는 작은 야산이 밀림을 이루고 있어 골을 이룬 곳에 여러개의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조선 연산군 때에는 화진포 주변의 '마장뿌리' 산봉우리에 세운 모화정(茅花亭)이 있어 화전(花煎)놀이와 휴식처로 활용한 관계로 현 죽정1리를 모정리(茅亭里)로 불러왔고, 現 죽정2리 인 중평리(仲坪里), 도발리(道發里), 죽림리(竹林里) 등 3개리와 모정리 (茅亭里)를 합쳐 1915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죽림리(竹林里)라는 '죽(竹)'자와모정리(茅亭里)라는 '정(亭)'자를 합쳐 죽정리(竹亭里)로 명명되어 오다가 일제시대에는 행정구역 개편시 본마을 중간으로 흐르는 중평천을 경계로 동쪽은 죽정1리, 서쪽은 죽정2리로 개편 되었다. 죽정1리(옛 모정리 茅亭里) 일대에는 선사시대나 고구려 때의 북방식 지석묘로 보이는 보이는 고인돌이 2㎞에 걸쳐 산재해 있으며 용수구미라는 곳에서는 10여년전 돌도끼, 기왓장, 돌칼 등의 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사실이 있다.
산학리는 원래 두 모퉁이로 나뉘어져 있어 옛 운근리(雲根里)를 고쳐서 산학리(山鶴里)와 열산리(烈山里)가 있었다. 고려때 여산현(驪山縣) 다음인 열산현(烈山縣)의 소재지가 열산리(烈山里)에 있었는데 조선시대 관제개혁으로 폐현(廢縣)되는 동시에 간성군에 속하고 현내면으로 개칭된 후 1915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두 부락의 '산(山)'자와 '학(鶴)'자를 따서 산학리(山鶴里)로 불렀는데 1914년까지는 현내면 소재지 이기도 하였다. 마을 뒤에는 고려초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주위 약 12m정도의 성지(城址)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쑥고개 봉화봉(烽火峰)에서 횃불로 신호하면 이곳에서 간성 고성산으로 연락하였다고 한다.
옛날부터 시냇가에 버드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어서 버드네라고 불러오고 있으며, 군량(軍糧)과 병기창고(兵器倉庫)가 있었다고 하여 창대리(倉垈里)라고도 부르며 산간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농작물과 목축의 소득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하여 화곡리(禾谷里)라 부르게 되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여 하늘이 가깝다고 하여 부르던 건달리(乾達里)와 원래 마직리(麻直里)라 부르던 아랫마을이 있었는데 마을의 남쪽에 꼭 말이 누워있는 형태와 같은 산이 있어서 후에 마직리(馬直里)라 고쳐 부르게 되었고, 1915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두 마을의 '마(馬)'자와 '달(達)'자를 합해 마달리(馬達里)로 되었다. 옛날에는 이웃마을인 마차진리(麻次津里)에 마직리(麻直里)의 동쪽 일부가 유입되었었다.
마차진리(麻次津里)는 고기(古記)에 마차진리(馬差津)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옛날에 인접한 마직리(麻直里)와 한마을로 병합하였을 때에 '마(麻)'자를 넣어서 마차진리(麻次津里라 고쳐썼다고 전하는데 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마직리(麻直里)가 분리 되면서 동편 일부를 흡수하고 무송대(茂松臺)부근에 수달리(水達里)로 편입하였다 한다.
마을 남쪽에 있는 무송대(茂松臺)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바닷가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으니 전에는 송도(松島)라고 하였으며 송림이 무성하고 모래길(沙路)로 육지와 이어지고 바닷물이 불으면 섬에 들어갈 수 없으며 파도가 치면 모래가 스치는 소리가 난다(沙鳴).
무송부원군 윤자운(茂松府院君 尹子雲)이 관동지방(關東地方)을 순시 할때 이 섬에 머물러 갔다고 하여서 그 후 무송(茂松臺)라고 이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섬 주위의 바위에 자시(子時)에 자연적으로 움직여갈라진다는 자마석(子磨石)이 있다.
평시에 무송정(茂松亭) 또는 무선정(舞仙亭)이라고도 부르는데 뱀이 없다고 하며 주위에는 잡어, 해조류와 방게가 풍부하게 서식하고있다고 한다.
민통선 마을로 동해를 바라보아 동해의 맑은 물과 백사장을 낀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명파리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광산천(鑛山川)과 명파천(明波川)이 흘러 마을이 형성되었기에 전답이 비옥하고 각종 어족이 풍부하다.
또한 속칭 광산골에는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광산이 개발되어 금, 은을 생산하다가 6.25로 중단되었던 것을 1970년 고명광산이 들어와 한때는 성업를 이뤘으나 지금은 폐광되어 그후 대림광업이 광맥을 찾았으나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고명광산의 은은 전국에서 순도 2위를 자랑하는 우수한 지하자원으로 각광을 받았었다.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6㎞지점에는 통일전망대가 있어 관광자원이 풍부하나 민통의 취약점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으나 1995년 6월에 민통선이 광산천 북쪽으로 이전함에따라 마을내 도로변에서는 관광객을 위한 식당 등 새로운 먹거리촌이 형성돼 찾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신라시대에 봉화를 올려 통신을 전하던 봉화봉(烽火峰) 또는 돛대봉이라 부르는 뽀족한 봉우리 아래에 마을이 위치하였다고 하여 배봉리(培峰里)라고 불렀다. 인근 명파리와 함께 민통선 북방의 출입영농을 하고 있다.
마을앞 해변에 섬이 있는데 옛부터 이 섬에는 화살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자생했다. 섬이 흡사 돼지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저도(猪島)라고 부르며, 1945년까지는 동해 북부선 철도의 저진역(猪津驛)이 있었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사천리(蛇川里)라 불렀고 중국 魯나라의 사수(泗水)의 지형과 흡사하다 하며 수양과 학문을 탐구하는 곳으로서 적임지라 하여 사천리(泗川里)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 사천소류지 : 사천리 100번지일대로 유역면적 3㏊, 몽리면적 20㏊, 제방연장이 30m 등으로 일제시대 축조되었으며 1986년 일부 개보수 됐다.
옛날에 검장리(檢長里)라 불렀으며, 이 마을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마을 생김새가 칼을 꽂은 형상과 같다고하여 1915년 劒藏里라 부르게 되었다.
세계적인 명산인 금강산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마을이었으나 6.25.동란 이후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간직된 휴전선이 있고 지금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 있는 그곳에 통일전망대가 1983년 7월 15일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