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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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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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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 가족신앙
A

불교나 도교등 외래의 종교가 이 땅에 들어 오기 전의 기원을 찾을 수 없으나 토속신앙이 있

었고 이 토속신앙은 근년 불교나 기독교의 광포로 전과 같이 성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아직

도 농어촌에는 그대로 행하여지고 있다.





조선왕조시대는 성황사 려단은 마치 국가에 사직단이 있는 것과 같이 제도적으로 고

을 마다에 설치되어 있어 조선총독부중추원문고18878호 고성읍지에 '城隍堂在郡東二里許東

龜岩下, 壇在郡北二里許東龜岩之西無祀神位幷藏于城隍堂室'이라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

승람(東國與地勝覽) 간성조(杆城條)에도 '社稷壇在郡面 文廟在鄕檀 城隍祠在城內西 壇在 郡北' 이라고 있다. 이것은 비단 고성이나 간성에만 국한된 기사는 아니고 이러한 토속신의 봉 제도화하였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토속신(土俗神)은 각 고을에 제도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군단위의 성황당이나 여단 말고도,

자연부락단위로 성황당, 산신당이 있었고 이외에 장승이나 솟대를 신체(神體)로 하고 있는

곳도 있다. 각 부락마다 있었던 성황당은 혹 고청당(告淸堂)이라고도 부르고 이 고청당의 제

를 고청제라고도 부른다. 사당으로 되어 있는 곳은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사당이 없이 노송이

나 고목으로 되어있는 곳은 당목이 신체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토속신앙에는 이러한 부락신

앙 외에 가족신앙이 있다. 가신으로 성조신(成造神), 조왕신, 삼신할머니, 토지신,

문신, 측신 등이 있어 이들 신에 대한 제향을 기도 또는 안택 혹은 고사라고 부르고 있다.





토속신앙으로 상기 부락신앙 외에 무(巫)가 있다. 무의 행사는 굿으로 나타나고 이에 종사

하는 사람을 무격(巫覡)이라 부르며 이 무중에는 세습무와 강신무의 두 종류가 있는데 이들

은 부락굿과 개인굿을 다 한다.





가족신앙의 대표적 행사는 안택제(安宅祭)이다. 안택제는 고사 기도 성조제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고성부락내에서는 시행하는 날짜가 일정치는 아니하나 10월, 11월, 1월에 많이 한다.

날짜는 일관(日官)이 길일을 잡아주면 그 전에 가족들이 금기를 하기 위하여 삼가고 집 앞에

는 황토의 무지를 깔고 금승(禁繩)을 쳐서 외인의 출입을 삼가게 한다. 이쪽에 금승을 치는 것

을 '송침'이라고도 불러 솔가지를 꺾어 금승에 달아 놓는다. 웃물을 쳐서 깨끗하게 하고 제주

는 목욕제계를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는다. 제수는 시루떡을 하고 술은 전에는 집에서 빚었으

나 지금은 사다 쓰고 있다.





행사(行祀)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식적 독축(讀祝)을 하는 방법이 있고, 둘째는

주인이 절을 하는 방법, 다시 말하면 무축제가 있고, 세째는 무당을 데려다 비는 방법이 있다.

 첫째의 독축식은 주인이 의관정제(衣冠整霽)를 하고 독축을 축관이 따로 하기도 하나 대개는

 주인 자신이 독축을 한다. 이 때 물론 축문은 주인이 독축할 만한 글이 되어야 한다. 둘째의 무

축식은 주인이 제수를 차려 놓고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거나 혹은 집안이 편하기를 비는 말 또

는 축원을 하기도 하며, 셋째의 무당이 하는 행사는 크게 할 때에는 안택굿을 하고 고사 때에

는 무당이 와서 빌어주는 것으로 끝난다.





토지지신에 대한 제사는 주인의 땅에서 오곡이 풍성하고 육축이 번성할 것을 기원한다. 토

지지신에게는 반갱(飯羹)과 주과포를 쓰고 제주는 주인이 된다. 제수는 가문에 따라 꼭 일정

하지는 아니하다. 토지지신에게 주과포 외에 어육을 쓰는 가문도 있다





성조신은 가내의 주신으로 집을 새로 짓거나 새집을 샀을 때에 성조를 모신다. 성조신은 성

주라고 하는 것으로 성주단지에 백미를 넣어 모시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한가지는 백지를 부엌

과 통하는 지붕 밑에 걸며 단지성주는 안방 고무다락에 올려 놓는다. 성주단지에 는 쓰는 쌀은

그 해 농사지은 햇곡식을 찧어 넣고, 백지성주는 들보를 바치고 있는 동자기둥에 매단다.





성조신은 그 집의 주신으로 이 제는 안방이나 안채에 대청이 있으면 대청에서 지내되 제수

는 백설기, 메, 채(菜), 주과포, 어육을 쓴다. 성조신은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항포구에서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선주가 배를 새로 진수하였을 때도 모신다. 동력선일 때는 길일을 택하

여 무당이 의식을 행하고 함에 넣어 배에 옮기고 성조봉안이 끝나고 나서 첫 출어에서 잡은 첫

고기는 말려 이 성조에 매달아 둔다. 범선의 경우에는 큰 멍에 밑에 백지를 달아 둔다. 선원들

의 말에 의하면 배가 풍랑을 만나 위급하게 되면 성주에서 소리가 난다고 한다.





조왕신은 부엌신 또는 부뚜막신이라 부르는 신으로, 화식(火食)을 주관한다. 조왕제는 부뚜

막에 제수를 차려놓고 지내며 반갱과 주과포로 지낸다.



 



◇영등(靈登)





풍신이라고도 부르는 속신으로 영등이라고도 한다. 농촌에서도 하고 있고 어촌에서도 하고

있다. 영등은 바람신으로 농촌에서는 풍재를 막아 달라는 뜻에서 행하고 어촌에서는 풍랑이

 출어시에는 생명과 직결되어 있음으로 더욱 성하다.





영등은 2월 1일에 내려왔다가 2월15일에 올라간다고 하여 이 기간을 영등기간이라 한다. 2

월1일에 비가 오면 '물영등'이라하고 바람이 심히 불면 '바람영등'이라 한다. 토성면 봉포에

서 조사된 영등 행사를 기록하여 보면 2월 1일에 주과포를 차려 놓고 그 해 첫 출어에서 잡은

고기를 부엌 구석에 걸어 놓았다가 이 날 떼어 제수로 사용한다. 제향(祭享)는 부엌과 뒷곁 장

독대에서 하고 주관은 주부가 한다.





이 기간에는 매일 새벽에 주부가 정화수를 떠다 놓으며 이 기간내에 시장에서 먹을 수 있는

 장꺼리를 해 오거나 이웃에서 음식물이 들어오면 반드시 장독대 영등에 갖다 놓았다가 먹는

다. 2월 1일의 축원사는 고정되어 있지 아니하고 주부가 "풍신(風神) 할머니 모씨 터전에 내

려왔으니 금년 일년 농사 잘되게 보살퍼 주시고 바다에도 풍조하여 사고가 없게 해 주시고 가

내가 태평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로 되어 있다. 오곡밥을 하는곳도 있고, 어촌에서는 이 날

은 출어를 아니한다.





영등 때에 비가 오면 풍신 할머니가 며느리를 데리고 내려 왔다고 하며 바람이 불면 딸을 데

리고 내려 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풍신 할머니가 내려 올 때는 며느리나 딸 중에 어느 한 사람

은 천상에 남겨 놓고 온다고 하는데 천상에 남아있는 사람은 15일동안 베를 짤 과업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베는 바람이 불면 말라 올이 자주 끊어져 짜기 어렵고 비가 오면 올이 눅어 짜기

쉽기 때문에 귀여운 딸이 남아 있을 때는 베짜기 쉽게 하라고 비를 오게 하나 며느리가 남아

있을 때는 며느리 고생하라고 바람이 불게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Q 2. 부락신앙
A

부락제는 거의가 성황당제 산신당제의 형태로 지금은 없어진 부락이 더러 있으나 어촌에는

 거의가 남아 있고 농촌에도 아직 더러 남아 있다. 제향 날짜나 규모가 다 다르나 당사(堂祠)

당목(堂木)이 있어 여기에서 지내고 있다. 농촌의 행사는 유식(儒式) 고축(告祝)을 통하여 하

고 일부 어촌에서는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한다. 제수도 잘 하는데는 소를 잡아 지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소 대신에 소머리와 사족(四足)을 쓰고 있다. 이렇게 두족(頭足)을 쓰는 이유는 두

족이 곧 소의 전체를 상징하는데서 연유한다고 전한다.





동제(洞祭)의 목적은 일년간의 동리의 태안을 기원하는데 있다. 본시 동제는 종교적 의미

만을 갖는 것이 아니고 일년간의 동사(洞事) 전반에 관한 협의를 곁들이고 있다. 이를테면 일

년동안 동리에서 선행한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을 칭찬하기도 하고 비행이 있을 때에는 그에

 대한 응징도 한다.





제주는 군내의 모든 동제에서 그 해의 생기가 맞는 사람 중에서 부정이 없는 사람을 골라 제

주로 삼기도하고 이장이 제주가 되기도 한다. 기타 헌관도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유사 또는 동

민의 천거로 결정한다. 제집사의 경우도 같고 비용은 동재에서 충당하는 데도 있고 가구 마다

 쌀을 공동 거출하기도 한다.





현재 고성지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부락제중 조사 되어진 것을 몇 개 그 실례를 들어 본다.

Q -- 가. 향로봉성황당제(香爐峰城隍堂祭)
A

이 성황당은 본시 고성군과 인제군과의 경계선인 향로봉 정상에 있었으나 군부대가 주둔하

여 출입이 제한되었으므로 고성군 간성읍 광산1리 광산초등학교 뒷산 기슭에 망제당을 시멘

트로 건조하고 지금은 여기서 지내고 있다. 옛적에는 정례적으로 음력 7월25일에 지내던 것을

 수복 후에는 제일은 매년 음 3월 3일과 9월 9일 2회를 지내고, 제수는 소 한마리 주과포 떡을

 쓰고 있다.



<축 문>



① 천제단에서는 하느님과 토지의 신(皇天后土之神)에게 지내는 제사 축문은







② 산신당(山祭堂)에서는 산(山)을 맡았다는 산신령(山神靈)에게 지내는 제사 축문은







③ 성황당(서낭신을 모신 사당)에서는 이 지역을 수호하는 신에게 지내는 제사 축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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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나. 간성읍 교동리 성황당제(城隍堂祭)
A

제일(祭日)은 전에는 새해들어 날받이 하는 사람에게 택일하여 향사(享祀)하였으나 지금은

 설날 새벽에 지내도록 일자를 고정시켜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지내고 있다. 제주는 생기를

 맞추어 이에 해당되는 사람을 뽑고 금기는 성황당과 제주 집에 새끼줄을 띄우고 황토 무지를

 만들어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금승(禁繩)은 윗쪽을 보며 오는 사람의 눈에 쉽게

 뜨이게 함이고 황토무지는 아랫 쪽을 보며 오는 사람의 눈에 쉽게 뜨이게 함이다. 금승은 대문

길에 맞추어 치고 황토는 대문 입구 양쪽 lOm중의 거리에 1m 간격으로 조그마한 무지를 만

들어 놓는다.





제향은 한문의 고축을 하고 제주가 동민을 대표하여 동리 소지(燒械)를 한다. 소지는 백지에 불을 붙여 신당 앞에서 을리는데 탄 재가 잘 올라가면 한번에 끝이며 잘 오르지 아니하면 세번까지 올린다. 소지가 잘 오르면 그 해는 동리가 태평하다하고 잘 오르지 아니하면 불길한

 징조라하여 그 해 동민들은 한해를 삼가야 한다. 동리 소지를 올린 뒤에는 개별적으로 각 가정

소지를 가구주가 올리는 것이 아니고 가구주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제주가 올린다. 이 때 가구

주가 올리지 아니하고 제주가 대신 올리는 것은 제주의 생기가 맞고 부정이 없어 신사에 합당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구별 소지를 올릴 때에도 한번에 잘 올라가면 그것으로 끝이고 금년

한해 그 가정은 무고할 것이라하며 잘 올라가지 아니하면 세번까지 올린다. 세번 다 올라가지

 아니하면 제 후에 개별적으로 그 가정 에 금년 소지가 세번 다 올라가지 아니하였음을 통고하

여 준다. 이 통고를 받은 가정에서는 다음 날 날받이에게 길일을 받아 그 가정만의 성황치성을

 다시 한다. 소지는 그 날 성황당제에 참한 사람의 가구것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불참하였더

라도 다 올려준다. 가구별로 성황치성을 할 때는 길일이 잡히면 그 가정에서는 제주의 금기와

 같은 방식의 금기를 하고 치성을 올린다. 이 성황제에서는 무당은 쓰지 아니한다. 제수로 쓴

음식물은 가구별로 공동분배를 한다.

Q -- 다. 죽정리 성황당제(城隍堂祭)
A

죽정리의 성황당은 현내면 죽정리 화진포 서편 산상에 있으며 제향은 년1회이고 제일은 음

력 정월 초정(初丁)일로 고정이 되어 있다.

 비용은 가구 마다에서 공동 분배된 현금을 모아 충당하게 되어 있으며 제수는 전에는 한 때

 닭을 썼으나 지금은 닭을 쓰지 아니하고 돼지 머리와 떡, 주과포를 쓰고 있다. 제주(祭酒)로

 쓸 술은 부정을 가랜 육사(育司)가 성황당 마당을 청결하게 하고 금승을 친 뒤 이 곳을 파서

 술독을 묻고 여기에 술을 해 넣어서 썼다.

 제주는 50세 이상이 동민 남자로 그 해의 생기에 맞는 사람을 뽑는다. 이 때 생기는 맞는다

할지라도 상주라던가 기타의 부정한 일이 있는 사람은 피한다. 제주로 뽑히면 대문에 금승을

치고 대문들어 오는 lOm 거리 양쪽에 1m 간격으로 황토 무지를 놓는다. 이것은 이 집이 금

기를 하고 있는 집으로 외인의 출입을 삼가 달라는 뜻이고 부정한 사람은 더욱 출입을 금하게

되어 있다. 제주로 뽑히면 그날 부터 외부 출입을 삼가고 제가 끝날 때까지 제주는 부인과 함

께 내방에서 지내지 않고 혼자서 자게 되어 있다.

 제주는 제일에 목욕 재계하고 새옷을 갈아 입고 참사를 한다. 제향은 한문 축문을 읽고 향사

는 밤에 하지 아니하고 낮에 하고 있다. 부락제나 일반금제가 자정에 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죽정리의 성황제는 낮에 하고 있다.

 비용을 가구 마다 공동 출자 한 탓으로 후손의 제수는 꼭 같이 나누어 참사(參祀)한 사람은 물론 참사치 아니한 가구에도 송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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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라. 거진읍 송정리 성황당제(城隍堂祭)
A

송정리의 성황당은「고청당」혹은「고청성황당」이라 하며「고청」을「告淸」또는「告請」으로

쓰는 곳이 있으나 제보자 李應圭씨(1982년에 83세)는 고청(高廳)이라 쓴다고 한다.





본시 오현면의 면성황으로 주신은 선행이 있는 여자신으로 되어 있고 주제는 무당(김글철)

이 근년 맡아 왔음으로 여기서는 유식(儒式)의 고축은 하지 아니하고 굿을 하고 있다.





이 성황당제는 두가지 소원을 빈다. 농촌의 성황제는 그 축문에 있듯이 부락이 안태(安泰)

하고 풍년이 드는 것을 기원하고 있으나 이 성황제는 부락의 안태와 어업의 번창까지를 기원

하고 있다. 따라서 송정리의 본성황제는 어촌 성황제로 보는 것이 옳고 그 예로 무당굿을 하는

데서 찾을 수도 있으려니와 성황굿이 어촌 속신이라는 점에서 확연하다. 내륙지방이나 해안지

방이라 할지라도 농촌 성황제에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곳은 거의 없고 그와 반대로 어촌 성

황제에서는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성황제의 기원은 잘 알 수 없으나 한일합병 후 일제에 의하여 미신이라고 한 때 금지시킨

뒤부터 송정리 앞바다에서 많이 나던 청어가 나지 않게 되었다. 어민들이 청어가 잡히지 않자

 그것이 송정리 성황제를 중단하였음으로 성황신이 노하여 그 보복으로 청어떼를 이 쪽으로 오

지 못하게 한데 연유한다고 호소하여 다시 택일을 하여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제수로는 청어가 많이 날 대는 주과포와 떡을 썼고 소도 잡아서 썼다. 성황금이 성하였을 때

는 삼일간 무굿을 하였고 참사하는 사람들은 어민이 많았다.


Q -- 마.토성면 봉포리 성황당제(城隍堂祭)
A

봉포리는 149가구중 3분의 2 정도가 어업에 종사하고 있고 어업을 겸하고 있는 집도 있다.

여기에는 어촌에 흔히 있는 남성황당과 여성황당이 있다. 남성황당은 마을 뒷산 아래 있고 여성황당은 그 아래 한칸의 당우(豈宇)는 지붕이 양철로 되어 있고 벽은 판자로 되어 있으며 위패는「城隍尊神之位」로 되어 있고 여기에 태실과 지화가 달려 있다.





여성황당은 마을 옆 언덕에 간수는 2칸이고 지은지 오래 되지 아니하다. 본시는 바닷가에

있던 것을 근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위패는「城隍之神位」로 되어 있고 여러개의 태실과 한지

가 걸려 있다. 들보에는 양쪽에「龍」자와「龜」자가 마주보게 쓰여져 있고「維歲 次在庚申九月

二十三日午時 立柱上樑 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이라 쓰여 있다.





성황제는 매년 가을 음력 초하루에 지낸다. 전에는 3년에 한번씩 단오굿을 하였으나 지금은

부락의 경제사정이 여의치 아니하여 정화수를 떠놓고 고축하는 것으로 굿을 대신하고 있다.

옛날 단오에 굿을 할 때에는 유명한 무당을 외지에서 불러서 지냈고 이 굿은 남성황당에서 1

시간 정도의 금을 먼저 한 다음에 여성황당에서 지냈다.

Q -- 바. 토성면 아야진리 성황당제(城隍堂祭)
A

아야진은 1리에서 6리까지 있고 1리에서 3리까지와 4리의 1부를 큰 마을이라 하고 4리의 1

부와 5, 6리를 작은 마을이라 부르며 인구는 약 4,000명이고 그 중 90%가 어업에 종사한다.

 여기는 토착민 보다는 6. 25사변 때 북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더 많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큰 마을과 작은 마을에 각각 성황당이 있으며 3년 마다 한번 성황굿을 한다. 두 마을이 같은

날에 하는 것이 아니고 한 마을의 굿이 끝나면 이어서 다음 마을이 굿을 하고 굿을 하지 아니

하는 해는 유식에 의한 성황제를 올린다. 제일은 음력 10월 초의 길일을 골라 정하고 제관은

 생기가 맞는 사람 중에서 바깥(바다를 말한다)선원이 아닌 선주중에서 3인을 선정한다. 이

선주의 선정기일은 제일 4, 5일 전에 한다. 제관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통고받으면 금기를

하여 부정을 가린다. 상가나 기제(忌祭)에 참사해서는 안되며 물론 그런집에도 가지도 못하고

 되도록 외출도 삼간다.





제수의 장만, 제향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한 도가(都家)도 선정한다. 도가가 선정되면 금승

을 치고 외인의 출입을 금하게 하며 제수는 소 한마리를 잡아 쓰고 어물을 이에 곁들인다.

 제주는 제향전에 성황당 마당에 금승을 치고 땅을 파서 항아리를 묻고 여기에 술을 빚어 넣

는다. 이 마을의 여성황은 포구 쪽에 있고 남성황은 마을 옆 언덕에 있다.





굿은 성황당에서 3일간 한다. 첫날 오후에 시작하여 다음날 자정께 까지하고 쉬었다가 아침

9시경 부터 다시 시작한다. 통상 16~17거리 굿을 하기 때문에 7, 8명의 무당이 돌아가면서

 한다. 주무당은 삼척군 근덕의「이금옥」이 맡는 때가 많다.





3년에 한번씩 하는 큰 굿은 비용이 300만원 정도 든다. 이 중 무당들에게 주는 돈은 1982

년의 경우 75만원이 들었다. 무당은 공식으로 받는 돈 외에 굿도중에 구경꾼이 특별히 치성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돈이 또 있다.





부락제인 성황제를 지낼 때는 소지를 올리는데 선주의 집이나 사업하는 집에서 특별 부탁을

 받은 것은 개별적으로 특별히 올리고 개별소지를 원하지 아니하는 집은 모아서 같이 올

린다. 소지가 제대로 올라가지 아니하면 축윈을 하고 다시 올린다. 굿을 하지 아니하는 해는

무당 한사람을 청하여 안태를 빈다.

Q -- 사. 죽왕면 공현진리 성황당제(城隍堂祭)
A

이 마을에서는 5.16 전까지 행하다가 5.16 후에 중단되었다. 이 부락제는 산신제와 풍어

굿을 겸하여 하였고 무당은 삼척서 왔다





제향을 주관할 도가(都家)가 결정되고 제주가 선정되면 도가와 제주 집은 송침이라고 부르

는 소나무 가지를 새끼에 끼어 다는 금승을 치고 외인의 출입을 금한다. 제주와 도가는 다같이

 생기를 맞추어 맞아야 하고 또 부정한 일이 없는 집을 택하게 되어 있다.





제일은 일정치는 아니하나 원칙적으로 정초에 지내게 되어 있고 제수용 쌀을 비롯하여 누룩

등은 상가라던가 부정한 집에서는 사지 않는다. 제일이 정초 이므로 세말(歲末)에 제수를 씻

을 우물 청소를 한다. 우물을 청소한 뒤에는 제사가 끝날 때까지 이 물을 쓸 수가 없음으로 우

물 치기 전에 용수를 길러가라고 동리에 가가호호 알린다.





술은 성황당 뜰에 독을 묻어 빚어서 쓰고 제수에 주과포와 떡, 그리고 송아지를 쓴다. 비용

은 가구마다 공동으로 부담하고 제수용 송아지는 숫송아지라야 하고 미리 사다 도가에 두었다

가 제일에 처음으로 코를 뚫어 제당에 끌고가서 제당에서 잡는다. 이 날에 처음으로 송아지의

 코를 뀌는 것은 코뀐 소는 성우(成半)이므로 신에게 성우를 바친다는 뜻이 있다. 택일 된뒤 제

전에 출산이나 상고(喪故)가 있으면 숨겨 두었다가 제사가 끝난 뒤에 부락인에게 통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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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아. 죽왕면 오봉리 성황당제(城隍堂祭)
A

날짜는 매년 1월 3일로 되어 있고 주관은 이장이 한다. 제주는 부정을 타지 아니한 사람중

에서 생기를 맞추어 선출하고 아헌(亞離)이하의 헌관도 다 부정을 가리어 선출한다. 이렇게

 선출된 사람들은 그 부락에서 사람의 출입이 가장 적은 호젓한 집의 방을 빌려 제승을 치고 합

숙을 한다.





제주는 성황당 뜰에 독을 묻고 빚어서 쓰고 제수로는 전에는 송아지를 도살하여 썼으나 지

금은 정육을 따로 사고 소의 두족을 사서 쓴다. 두족을 쓰는 것은 두족으로 소 한마리를 표상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성황당에는 옛날에는 동으로 만든 말과 안장이 있었다. 이것은 성황신이 타고 다니던 것

이라 하여 여기에 제향을 올렸으나 지금은 당목에 지내고 있다. 제후(祭後)에는 제수를 각 가

구마다 공평하게 분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