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암사는 금강산 최남단의 절로서 지금으로부터 약1216년전(서기769년) 신라 36대 혜공왕 5년에 진표율사가 설악산 북쪽기슭에 창건하고 화암사라 이름하였다. 화암사 기록에 따르면 이절은 다섯 차례나 화재를 입었다고 전한다.
이절 남쪽에 있는 수바위와 북쪽에 코끼리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맥이 서로 상충하는 자리에 절터가 있어 수바위가 뿜어내는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여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다고 전한다. 이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절은 창건 당시위치에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장소에 있다. 지금의 화암사는 고종원년에 또 화재로 소실되어 그해 9월에 수봉으로 이전하여 건립하고 수암사라 이름하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임자년 1912년에 "화암사"라 개칭하였다.
화암사 남쪽 300m지점에는 수바위라는 왕관모양의 우람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서 화암사 창건자인 진표율사를 비롯한 이절의 역대스님들이 수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계란모양의 바탕위에 왕관모양의 또 다른 바위가 놓여 있는데 윗면에는 길이 1m, 둘레 5m의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물이 항상 고여 있어 가뭄을 당하면 웅덩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왔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수바위 이름의 '수'자를 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바위의 생김이 뛰어나 빼어날 秀자로 보는 사람이 많다.
수바위의 전설을 보면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은 항상 시주를 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절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그 곳을 찾아 끼니때마다 지팡이로 세 번 흔들라고 말하였다. 잠에서 깬 스님들은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꿈을 생각하며 노인이 시킨 대로 했더니 두 사람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 후 두 스님은 식량 걱정 없이 편안히 불도에 열중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객승 한사람이 찾아와 이절 스님들은 시주를 받지 않고도 수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걱정 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객승은 세 번 흔들어서 두 사람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 번 흔들면 네 사람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넣고 여섯 번을 흔들었다. 그러나 쌀이 나와야 할 구멍에서는 엉뚱하게도 피가 나오는 것이었다. 객승의 욕심에 산신의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고려 때 어느 원님이 관직에 오래 있으려면 3곳에 우물을 파고 4곳에 연못을 만들고 5가지의 나무를 심으면 관직에 오래 머물 수 있고 장수한다는 말을 듣고 간성골에 3곳의 우물과 4곳의 연못을 파고 은행나무 등 5가지의 나무를 심었다 한다.
그 후 이 우물과 연못, 나무 등을 가리켜 三井 四池 五木이라고 불러왔는데 지금 三井과 四池는 개화되면서 점차 외지에서 찾아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매몰되고 집들을 짓고 해 모두 없어졌으나 五木중에 하나가 현재 군청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로 고목이 된 이 은행나무도 지난 1964년 가을 썩은 곳에서 불이나 연 3일동안 타다남아 지금은 봄이 되도 잎이 절반 밖에 피지 않고 있다.
삼정(三井)
- 현재 2개소 보존되고 있음
-- 군청앞 현존, - 천주교입구 중앙여관앞 현존, - 현 산림조합과 하리사무소 부근
사지(四池)
- 현재는 전부 매몰되어 없음
-- 상리 460번지 함희조씨 대지 부근, - (구)경찰서 앞 길 건너편, - 간성우체국 대지, - 하2리 사무소 부근
오목(五木)
- 오목중 은행나무 2주는 6.25동란까지는 있었으나 그중 암은행나무가 폭격으로 없어지고 현재는 수은행나무 1주 만 군청 앞에 잔존하여 있음. 다른 3주는 모두 없어짐.
탁발승에게 보여준 이절 승려들의 행실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나태하고 타락한 것이었다. 탁발승은 생각끝에 이들에게 훈계로는 문란해진 생활을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후 "앞으로 3년 동안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 부처님의 노여움을 크게 사리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절을 떠났다. 탁발승이 떠난 뒤부터 이절에는 전에 없던 빈대가 득실거리기 시작하여 승려들을 괴롭혀 앉아있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승려들은 잠자리를 마당이나 숲속으로 옮겼으나 빈대는 여전히 괴롭혔다. 참다못한 승려들은 마침내 회의를 열었다. "이러한 상태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3년 동안 떠나 생활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빈대들도 먹을것이 없어 굶어죽게 될 것이니 그때 다시 모입시다." 하고 한 노승이 제의했다. 그러자 다른 승려들도 모두 찬성하여 3년 후 추석날, 다시 모이기로 한 후 제각기 흩어졌다.
절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승려들의 생활이란 편할 리가 없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이집 저집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하고 찬 이슬을 맞으며 숲속에서 자기도 하며 떠돌아 다녔다. 그런데 중들은 속죄는커녕 자기들이 왜 고생을 하는지 반성하지도 않고 빈대를 피할 수 있었던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덧 3년이 지나자 중들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중들은 마당에 모여 그동안의 고생을 이야기하면서 빈대가 없어진 절 주변을 돌아보며 서로 기뻐하였다.
중들은 법당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처님 앞에 난데없이 금주(金柱)가 서 있었다. 중들은 자기들의 3년 동안 고생을 불쌍히 여겨 부처님이 하사하신 금기둥이라 믿고 기쁜 마음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천둥과 함께 금기둥은 무너지고 기둥에 매달렸던 중들은 그 밑에 깔려 죽었다. 그 기둥은 금기둥이 아니고 빈대들이 3년동안 부처님 앞에 응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기둥을 이룬 빈대기둥이었던 것이다.
후일 사람들은 이절을 찾아 왔던 탁발승을 게으르고 타락한 중들을 구제하려 왔던 부처님의 현신이라 말하고 있다. 그 후 적곡사는 폐허가 됐고 따뜻한 물이 솟아오르던 온천도 서서히 찬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산나물을 캐러왔던 아낙네들이 타는 목을 이 샘터에서 축이며 쉬어갈 뿐 천년의 세월 속에 수풀만이 우겨져 있다.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강릉 함씨 장손인 구나무(큰 참나무)집 앞에 큰 우물과 발 방앗간이 있었다. 어느 날 이 집에 늠름한 한 아이가 태어나 가족들이 무척 좋아했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집 안방에 아이를 눕혀놓고 방앗간에 갔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와 평소 담배를 올려놓았던 선반에 손을 뻗어 더듬다가 물컹한 물체가 잡혀 놀라 살펴보니 안방에 눕혀 놓았던 이 아이가 선반 위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안방에 뉘어 잠재워 놓고 방아를 찧으러 갔는데 이 아이가 실겅 위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집안에서는 이일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문중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이 아이가 분명 장수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가족들은 나라에서 장수가 태어나면 그 집안의 삼대를 멸종시킨다는 속설에 미리 겁을 먹고 이 아이를 돌을 달아 우물에 집어넣기로 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돌을 달아 우물 속에 넣고 그 우물을 메우게 된 것이다. 그날 밤 자정무렵 마을 뒷산 넘어 방추 골이라는 연못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이튿날 아침에 동네 어른들이 나가 살펴보니 장수를 태울 용마가 죽어 있었다. 용마를 묻어주고 그 안장을 집안에서 보관했었으나 6.25동란 때 소실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우물은 옛날 이곳 땅 속에서 용마가 솟아나와 하늘로 오르면서 생긴 것이라 한다. 이 용마는 금수리 구나무집에서 날개 달린 장사가 태어났는데 이 장사를 등에 업고 가기 위해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마을 사람은 이 우물이 얼마나 깊었는지 온 동네 명주실을 끌어다 넣어도 끝이 없었다고 전한다.
천혜장은 장사가 용마를 타고 군사훈련을 하던 곳으로 현재는 고성군 공설운동장이 되었다.
이 산은 강한 바람과 심한 경사로 나무들이 살지 못하고 벌거숭이 인데다가 돌 바위가 영을 덮어 그 모양이 마치 늙은 노인의 머리처럼 보인 다해서 노인산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이 산 밑에는 옛날에 절이 있었으나 조선시대 초기에 불교 탄압으로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이 절터를 찾아 기도하며 소원성취 되기를 빌어 왔다고 하는데 어느 해 이 마을에 사는 5대 독자인 노총각이 마흔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가 백일동안 노인산과 절터를 찾아 기도 끝에 어여쁜 아내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이 부부사이에 1년이 넘어도 아기가 없자 또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려 아기를 낳게 되었는데 아기 팔 밑에 날개가 달린 장사를 낳았다. 그러나 온 마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두 부부는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날개를 인두로 지져 없애 버렸다. 청명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면서 심한 비바람과 함께 번개와 천둥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에 놀란 두 부부는 아기가 잠자고 있는 방으로 급히 달려갔다. 이 어찌된 일인가? 잠자던 아기는 오간데 없었다. 하늘에 오를 날개를 없앤데 하느님이 노하시어 날개대신 용마를 보낸 것이다. 이 용마는 화진포에서 나와 아기를 업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진부령을 가는 길에 향로봉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간성에 어떤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렵게 자식을 하나 두었다.
이 아이가 7살에 글을 배웠는데 하루는 어떤 개나리봇짐을 한 사람이 오더니 “이 녀석 나긴 잘 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놈이 나긴 잘 났는데 단명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다급한 마음에 “단명하면 저걸 어떻게 하냐? 어떻게 푸는 방법이 없겠는가?”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이 아이를 십년만 어디 한데 나가 고생시키라.” 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어린 아이를 객지에 보내 십년을 혼자 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딴 방법이 없소?"라고 물었더니 나그네는 “향로봉사를 찾아 가든가”라고 했다. 여러 가지로 향로봉사라는 절은 이미 들어 알고 있지만 혼자는 못 보내니 십년을 다니며 빌어먹을 판이었다.
다행히 늙은 하인이 “난 이제 죽을 날이 며칠 안 남았으니 내가 데리고 나가서 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하인이 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1년이 되자 숨이 차 금방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어 여덟살이 된 아이에게 “도련님, 도련님이 저 향로봉사라는 절을 찾아 가시오.”라고 해 이 아이는 향로봉사를 찾아 나서게 됐다. 일찍이 어른들로부터 얘기들은 바 있는 향로봉사를 찾아 골짜기를 들어가 보니 퇴락한 집이 있는데 스님은 기거하지 않았고 절을 둘러보니 벽에 큰 부처가 있고 양쪽에 작은 부처둘이 있었다.
마당에는 나무를 해 땐 재를 담아 둔 잿독이 3개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잿독을 파서 그중 2년이상된 불씨를 찾아 그것으로 절에서 시주를 해 왔던 것으로 보이는 쌀로 밥을 해 부처에게 공양하고, 인근에서 풀을 뜯어 나물죽을 조금씩 끓여 먹게 되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아이가 열일곱살이 되는 날 하루는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벽에 있던 큰 부처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야, 너 내일 아침에는 일찍 밥 먹고 내 뒤에 와 앉아라.” 그래서 이 아이는 큰 부처가 시킨대로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부처 뒤에 앉았는데 바깥에서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큰 호랑이가 문을 벌떡 열고 들어와 “가 내놔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부처는 “일년만 더 연기를 해 다오, 우리가 수백년을 굶어왔는데 애로 인해 배를 채우고 지금까지 살았어. 우리 삼형제가 부탁하니 일년만 연기해 다오”라며 큰 호랑이에게 사정했다. “그래 좋다. 일년만 연기를 해 주마.”하고 호랑이가 돌아가 일년을 더 살 수 있었다. 일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둘째 부처가 아이에게 “야 내 뒤에 앉아라.”했다. 이번에도 호랑이 나타나자 둘째 부처가 사정해 또 일년을 살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셋째 부처가 사정해 일년을 살 수 있게 되어 아이가 20세가 됐는데 큰 부처가 “내일 아침에는 여기서 자고 새벽에 떠나라. 저 아래로 가면 우물이 하나 있다. 그 우물곁에 처막이 하나 있는데 그 뒤에 큰 버드나무가 하나있다. 버드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여자가 나와서 물을 물동이에 퍼서 담을 때 아무말도 하지 말고 여자뒤에 가서 허리를 꽉 껴안아라.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날 살려주시오’하고 애걸 하는데 여자가 놓으라고 해도 절대 놓지 말고 남자의 힘으로 여자의 허릴 꽉 껴안으면 여자가 방으로 들어 갈 것이다. 방에 들어가서도 허리를 놓지 마라.”라고 했다.
이튿날 새벽 그 아이는 부처에게 눈물을 흘리며 하직 인사를 하고 절을 나와 부처가 얘기한 우물곁 수양버드나무 뒤에 가만히 숨어 있었다. 날이 샐 무렵 처막에서 삐끔이 문을 열고 한 여자가 물동이를 들고 나와 사방을 휘 둘러본 다음 이상하게 하늘을 쳐다보더니 정신없이 대여섯 바가지 물을 퍼 낼 때 아이가 얼른 뛰어나가 여자의 허릴 꽉 끌어안았다. 여자는 “아이 왜이래요. 웬 사람이 와서 끌어안고 이러냐?”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날 살려주시오”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리자 여자는 물동이를 놔두고 처막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강제로 끌려 들어갔다. 그때 벽락같이 큰 호랑이가 나타나 문앞에 서더니 “어휴 누님 말이여, 엉 고걸 못 참아가지고, 고새를 못 참아서 말이여, 평생을 여기서 산짐승 노릇을 하면서 살꺼냔 말이여.”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옥황상제의 아들과 딸이었는데 아들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땅에 내려오는데 혼자 보내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 누이와 함께 보낸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10년 동안 수도한 것이라고 한다. “난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 아이를 잡아먹어야 호랑이 가죽을 훌떡 벗고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니, 그 누이는 “야, 너가 그 사람과 똑같이 한날한시에 난 사람을 찾으면 될 것이 아니냐. 거기서 그 사람을 대신 세우고 하늘에 올라가거든 어머니, 아버지한테 몹쓸 누이년이 민가에 내려가 십년 고생 하다가 땅 사람과 인연을 맺어 그곳에 못 올라간다고 하거라.”라고 말했다. 여자는 하늘사람이라 할지라도 십년동안 처녀가 내려와서 이를테면 인간의 온기를 못 봤는데 여자가 갑작스레 따뜻한 남아 온기를 느껴보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이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었지만 거기서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부모를 찾아 가지고 숨어서 잘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 아이가 단명에 갈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운명을 새롭게 바꾼 것이다.